적(寂)... 정일근 작은 등불을 밝히고 일주문 밖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전화를 거는 젊은 여승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녁부터 시작한 산사의 눈 공양은 새벽이 와도 그치지 않고 고요한 절 마당 위로 더욱 적요한 눈만 덮여 법도 말씀도 동백나무들의 뿌리마저 추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때 몰래 마음 문 열고 나와, 끊어진 세상의 길에 줄 이으며 파르스름하게 떨리는 목덜미를 보고 말았습니다 그 모습 누가 볼까, 눈발은 소리 없이 굵어졌지만 문 안에서 따라나온 긴 발자국들도 이내 숨어버렸지만